정상회담 합의 깜짝 발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은 2000년 4월 10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놀라운 대사건을 발표했다.
413총선을 불과 사흘 앞둔 때였다. 박 장관은 주무장관인 박재규 통일부 장관을 옆자리에 앉혀 의기양양하게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초청에 따라 2000년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평양을 방문하기로 북한과 합의했다는 큰 뉴스였다.
북한도 같은 시각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 합의 사실을 동시에 발표했다.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은 기가 막힌 국내외 기자들에게 놀라운 소식의 뒷이야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3월 9일)이 나온 직후 북측이 비공개로 다양한 경로를 통해 남측에 접촉을 제의했고,이 접촉에서 남북 정상회담 개최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해 왔다.이 같은 북측 제안에 대해 김대중대통령은 여러 정황을 고려해 나를 특사로 임명하고 북측 인사들과 접촉하게 했다.박지원 장관의 설명에 따르면 남북 간 첫 특사 접촉은 2000년 3월 17일 중국 상하이에서박 장관과 북한 송호경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약칭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간 비공개로 진행됐다.이후 3월 22일과 4월 8일 두 차례에 걸쳐 중국 베이징에서 특사 접촉이 추가되었고,4월 8일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최종 합의됐다는 것이다. 박지원 장관은 북한이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경제지원 등을 요구한 사항이 없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그러나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런 공식적 설명은 사실과 다르다. 우선 남북 양측 특사가 만난 것은 박지원 장관의 설명보다 열흘가량 빠른 3월 8일이었다.장소는 싱가포르로 10일까지 비밀리에 접촉이 이뤄졌다.박지원 장관과 송호경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의 첫 만남에는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과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이 배석했다.그리고 재일동포 2세로 북측에 발이 넓은 요시다 다케시 신일본산업 사장도 그 자리에 있었다.남북정상회담과 현대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이 잘 드러난다.베일을 벗은 싱가포르 비밀접촉 남북특사 간 싱가포르 비밀접촉은 잠시 뒤 확인됐다.2003년 2월 14일 퇴임을 열흘 앞두고 국민 여론에 몰린 김대중 대통령은 대북송금 의혹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고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대국민 사과를 했는데, 이때 부설명에 나섰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 박지원의 실토로 처음 공식 확인된 것이다.김 대통령 담화 발표에 이어 임동원 청와대 특보가 대북송금 문제에 대해 해명하고,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은 정상회담 사전접촉에 대해 설명했다.박지원 특사의 싱가포르 비밀접촉설은 그 전부터 유력한 소문으로 정치권에 떠돌았다.싱가포르 접촉 여부는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한 남북특사접촉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였다.이날 박지원 비서실장은 남북정상회담 논의를 위해 2000년 3월 8일부터 10일까지싱가포르에서 손호경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과 극비리에 접촉했음을 처음으로 시인했다.”지금까지 거짓말을 했느냐”는 기자들의 추궁에 그는 “북측에서 회담을 비공개로 해달라고 요구했고 향후 국면이 분명치 않을 수도 있어 그렇게 했다”며외교관례상 북한과의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한마디로 당시 접촉은 정상회담 탐색전이었다고 한다.싱가포르 비밀협상은 정몽헌 현대 회장이 다리를 놓은 것이었다.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과 송호경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이 처음 만났을 때정몽헌 회장과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이 자리를 함께해 양쪽을 소개했다.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어 남북 비밀협상 성공의 결정적 기여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는 조총련계 재일동포 2세로북한과 무역중개업을 하는 요시다 다케시 신일본산업 사장이었다.김대중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기 하루 전인 2월 13일자 ‘한국일보’는 요시다 사장과의 인터뷰 기사에서 당시 상황을 상세히 전했다.요시다 사장은 인터뷰에서 2000년 3월 8일부터 10일 사이에 남북정상회담 예비협상을 시작할 때 그 사전 세팅(준비)을 내가 했다고 털어놨다.자신이 남북정상회담 아이디어를 북한에 제안하고 박 장관과 송 부위원장이 만나도록 하는 세팅도 했다고 한다.그는 “정몽헌 당시 현대그룹 회장과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도 그때 싱가포르에 있었지만 협상 현장에는 배석하지 않고 주변에서 대기했다”며”여러 호텔을 옮겨 협상이 이뤄졌는데 정몽헌, 이익치 회장은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저와 함께 커피숍 등에서 협상이 잘 되길 바라는 이야기를 나누며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함경도 출신인 요시다 사장은 일본으로 귀화한 그의 아버지가 김일성 주석과 가까운 인연으로 대를 이어김정일 국방위원장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일본에서 대북 채널 역할을 했다.그는 1년의 절반가량을 평양에서 보내 북한 지도부의 신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현대가 금강산 관광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현대와 북한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정주영 현대명예회장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면담을 주선하고 송호경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강종훈 비서장, 황철 실장 등 대남 사업을 관장하는 북한 주요 인사들을 현대 측에 소개한 것으로 알려졌다.그는 1995년 일본 자민당의 가토 고이치 정조회장이북한과 쌀 지원에 대한 비밀협상을 벌일 때 비밀창구로 지목돼 일본 정계를 떠들썩하게 하기도 했다.그렇다면 정부는 왜 그동안 싱가포르 비밀협상 사실을 그렇게 숨겨왔을까?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은 2002년 10월 국회 운영위 국정감사에서 싱가포르 방문 사실 자체를 부인했으나야당 의원들이 증거를 들이대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그는 2000년 3월 8일부터 11일까지 개인적으로 휴가차 방문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북한인을 만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또 요시다 사장을 2001년 여름 두 차례 만난 적이 있다고 시인하면서도 북한과의 비밀협상은 끝내 부인했다.정부는 2001년 2월 한 외신이 싱가포르 비밀협상과 대북송금 의혹을 보도하자장문의 반론문을 보내 게재하도록 했다.그만큼 싱가포르 비밀협상은 김대중정부 햇볕정책의 아킬레스건이었다.이 협상은 남북관계 개선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밀실 거래였다. 그 실체가 밝혀지면 앞서 거론한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에 대한 정당성 논란이 일 것이고,결국 남북정상회담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논란에 휩싸일 가능성이 컸다.여기에 현대그룹이 협상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사실까지 더해지면 정경유착이라는 비난은 물론,정상회담을 포함한 햇볕정책 성과물을 뒷거래로 구입한 혐의를 받고 있다.선심성 논란도 더 커졌을 것이다.때문에 박지원 실장은 베를린 선언 이후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특사 접촉이 진행됐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그 이전에 있었던 싱가포르 비밀협상은 끝내 부인했다.싱가포르 비밀협상은 시기적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과 직접 연결돼 있었다.유럽 순방에 나선 김 대통령이 프랑스를 거쳐 베를린으로 향하는 시각에 박지원 장관은 송호경 부위원장과 싱가포르에서 담판을 벌이고 있었다.상황으로 보아 싱가포르 협상의 내용은 시시각각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며,이를 토대로 정부 차원에서 대북 지원을 확약하는 베를린 선언이 발표됐다는 분석이 설득력이 있다.이는 김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북한을 돕겠다는 베를린 선언을 발표하자 북한이 이에 호응해 왔고이것이 남북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는 지금까지의 공식 설명과는 크게 다르다. 앞뒤 순서가 바뀐 것이다.아무런 사전 접촉이 없었는데 북한이 베를린 선언을 보고 남측에 접촉을 제의했다는 것은 그동안의 남북관계 진행상황으로 볼 때비디오 머그 박지원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답답한 설명이었다.출처_ (저서) 햇볕정책을 위한 변론 민현배 왜 위장탈당을?민형배 더불어민주당 검사 왕박 위장탈당 헌재 위헌?위장 탈당이 아니라고 우긴 민현배 상황은 민현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5월 12일 민…blog.naver.com민형배 더불어민주당 검사 왕박 위장탈당 헌재 위헌?위장 탈당이 아니라고 우긴 민현배 상황은 민현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5월 12일 민…blog.naver.com민형배 더불어민주당 검사 왕박 위장탈당 헌재 위헌?위장 탈당이 아니라고 우긴 민현배 상황은 민현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5월 12일 민…blo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