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6일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민주화운동, ‘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된 날입니다.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유신독재체제를 붕괴시킨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우리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를 되찾게 해준 부마민주항쟁의 숭고한 역사, 함께 보시죠? 10월 16일자 마민주 항쟁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 등지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배경
정치적 배경,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는 정치·사회적 갈등을 빚어 왔는데, 1979년에는 한계에 달했습니다.반정부 세력에 대한 연행·체포·고문·연금 등 강압적인 정책이 잇따르는 가운데 야당과 재야 세력의 저항이 높아졌습니다.경제적 배경 1978년 제2차 오일 쇼크 이후 한국 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빠졌어요.특히 노동 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된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나빴습니다만.1979년 들어 부산 지역 부도율은 전국의 2.4배, 서울의 3배에 달했습니다.사회적 배경 1970년대 말부터 경공업 부문을 중심으로 민주 노조를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뒤 정부와 충돌이 빈번하게 되었습니다.특히 1979년 8월에 일어난 YH사건은 부마 민주 항쟁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가발 제조업자였던 YH무역은 일방적인 폐업을 통보했고 노조는 이에 대항하고 농성을 했는데 회사가 건물을 폐쇄하자 200여명의 노동자가 신민 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했습니다.그러나 정부는 1,000여명의 경찰을 신민 당사에 투입하고 노동자를 강제 연행하고 현장에 나왔던 기자 및 새 민주당 국회 의원과 당원에도 폭력을 더했습니다.사건 직후, 강제 연행에 반대하는 시위가 격화되면 새 민주당 총재 김영삼 씨가 의원직에서 제명됐고 이는 부마 민주 항쟁을 촉발했습니다
부산에서 시위가 시작되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도서관 앞에서 5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였습니다. 교문을 나선 학생들은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 시내 중심가까지 나아가 반정부 구호를 외쳤고, 이를 막으려는 경찰과 곳곳에서 충돌했습니다.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들이 부산대학교 학생들과 합류해 거리 시위를 벌였고, 이날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경찰관과 학생 100여 명이 부상했습니다.1979년 10월 17일 17일에는 학생들의 시위가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가세해 시위대는 5만에 달했고 화이트칼라, 노동자, 상인, 업소 종업원, 고등학생들도 참여했습니다.학생 시위는 이미 시민 항쟁 양상을 띠고 있으며, 밤늦게까지 이어진 시위에서 학생·시민들은 KBS 부산방송국과 도청·세무서·파출소 등을 공격했습니다.
마산으로 번진 시위’ 1979년 10월 18일의 시위는 18일 마산으로 번졌습니다. 해질녘에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집결해 일부 시민들과 함께 격렬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사태가 확산되자 박정희 정권은 부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했습니다.1979년 10월 19일 시위 열기는 더욱 뜨거워져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교와 마산산업전문대학, 그리고 일부 고등학생까지 가세하여 약 8,000명에 달했습니다.1979년 10월 20일 경상남도 마산과 창원에도 위수령이 발동되었고, 부산에는 공수부대가 동원되어 강경 진압이 이루어졌습니다. 계엄령과 위령 발동 후 부마민주항쟁은 표면적으로는 단시간에 진압되었습니다. 그러나 부마민주항쟁 직후 10·26사건이 일어나 유신체제도 끝을 맺었습니다. 부마민주항쟁의 의의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유신정권이 끝나는 계기인 1026사태를 발생시켰습니다.부마민주항쟁에 대한 대응 방식을 놓고 집권층 내부에서는 갈등이 생겼습니다. 바로 항쟁 대응 방법을 놓고 온건파와 강경파가 대립한 것입니다.온건파였던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는 10·26 사태로 결국 유신체제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이로써 부마민주항쟁은 민중이 저항의 주체가 되어 18년간 지속된 박정희 독재체제를 무너뜨렸습니다.
지금의 민주주의를 존재시켰던 그날의 역사를 기억합시다!
지금의 민주주의를 존재시켰던 그날의 역사를 기억합시다!